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단순히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성인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라고 해야 맞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문을 전하는 말은 더욱 참기 어렵다.
“ 꼭 너만 알고 있어라.”든지,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라든지 이렇게
시작하는 말들은 세상 사람이 이미 아는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니 난 하수임이 틀림없다.
모임에 나갈 때마다 오늘은 침묵으로 일관해야지 해 놓고 돌아올 때는
늘 후회를 반복한다.
말에 대해서 공자는 여기저기서 들은 말을 옮기는 행위에 대해 비난을
아끼지 않았을 뿐 더러 덕을 버리는 꼴이라고 깎아내렸다.
노자는〈도덕경〉에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한 자는 알
지 못한다.(言者不知)”고 했다.
진정으로 앎에 도달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내용을 허투루 말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불가에서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하고, 가톨릭에서 ‘침묵
피정(沈默避靜)’을 하는 이유도 말의 무게를 경계하기 위한 일이 아니
던가.
말은 조금이라도 잘못 나가면 칼보다 더 날카롭게 상대방의 가슴을 찌
른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므로 말을 삼가고 경계하라는 뜻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
이다. 공자는 교묘한 말과 살랑대는 낯빛을 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드물다고 했고, 예수는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
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더럽게 한다고 고 했다.
불가의 묵언수행(默言修行)이나 카톨릭의 피정침묵(避靜沈默)은 말 자
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말하기 위해 행하는 수행이다.
누구를 만났을 때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을 더 잘 듣게 되는 것이
이치다. 이쪽의 침묵이 저쪽에 대한 경청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默言修行인 것이다.
어떤 할머니가 자기 남편이 동네 다방 마담과 바람을 피운다며 산사로
스님을 찾아 하소연하러 왔다 치자. 할머니는 갑갑한 속내를 들어 줄 사
람이 필요해서 스님을 찾아온 것이지 스님에게 답을 구하려고 온 것은
아니다. 그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가 측은하기도 하고, 동네 사
람들이나 자식들 보기 민망할 따름이었다.
할아버지의 바람기를 응징하려고 했다면 경찰서로 가야지 왜 산사에 올
라왔겠는가. 이 경우 스님은 쓸데없이 불교 교리를 내세우면 안 되는 것
이다. 그저 미소와 함께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산사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어쩌면 할머니는 이미 많이 누그러졌을 것이
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조언
이 아니라 자기 과시일 뿐이다.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다.
‘들으면 병이고, 듣지 않으면 약’이라 했다.
또한 침묵은 다투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갈 일이 있다면 과거보다 말을 줄여보라.
그러면 사람들의 얘기가 더 많이 들릴 것이고, 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
게 될 것이다.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어쩐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등.
단지 말 수를 줄인 것뿐인데 그 댓가는 상상을 넘어선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한 박자 늦추라.
그것이 진정한 고수의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