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끝으로 오라
막네 손녀가 사회초년생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는 소식을
듣고 글을 몇 줄 써본다.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 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누에고치에서 번데기가 나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바늘구멍만 한 틈새에서 몸 전체가 비집고
나오려고 한나절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생각에 가위
로 구멍을 넓혀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보다 더 사랑과
자비가 많다고 자족하면서 혼자 웃었다.
내가 넓혀준 구멍으로 나비는 쉽게 나왔으나 문제가 생겼다.
공중으로 몇 번 솟아오르려 시도하지만 결국 날지 못하고 땅
바닥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방이
작은 틈새로 나오려고 애쓰는 시련을 거치면서 날개의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말라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
았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게 살기를 원한다.
고통을 싫어하고 기쁨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통 없이는 여물 수 없다.
나방처럼 난관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생존의 힘을 기를 수 있다.
아픔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고난은 우리의 인생을 위한 담금질
이며 바닥짐이고, 영적 성숙을 위한 자양분 아닌가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나는 말했다.
“갈 수 없어요. 무서워요”
신이 또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나는 말했다.
“갈 수 없어요, 추락할 거예요”
신이 다시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그래서 나는 갔고
신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올랐다.
지금 절벽 끝에 몰렸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갑자기 나를 절실하게 만든다.
그 중요한 순간에 생명력이 솟고 우리는 신이 토해내는 숨결이
된다. 세상은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도망칠 곳은 없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만들고 자신도 몰랐던 날개가 돋는다.
무언가 절실하게 갈구하는 순간이 날개였다.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있다면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닐 가능
성이 크다.” 아마도 자신의 길로 여긴 타인의 길일 것이다.
자신의 길은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알아가야 한다.
신은 그런 길을 좋아한다.
그래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외친다.
단테는 “인생 여정의 어두운 숲속에는 반드시 길이 숨겨져 있다.”
고 했다.
남과 다른 길을 가는 것, 없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모험일지 모른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만 비로소 성공이 보인다.
새로운 길을 찾을 때 생기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은 “캥거루족‘ 1위다
30을 전후한 나이에도 부모 집에 얹혀사는 청년들이 취직, 결혼, 출산을
“연쇄 지각”하고 있다, 이들은 부모에게 얹혀살며 생활비를 얻어쓰고 있다.
이웃 일본은 “패러사이트 싱글”(기생충 독신)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70대 여성이 40대 두 아들이 계속 집에 얹혀살자 법원에
소송을 내는 일이 벌어졌다. 법원은 두 아들에게 연말까지 집을 나가라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이 심하지만 다른 나라들도 마찬
가지란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자기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의연하게
정진하라고 했다. ’자기부인‘이란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을 말하며 ’십자가‘
란 자신의 목숨을 기꺼히 담보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아 오늘을 사는 것이다.
작금의 캥거루족들이 이게 무슨 말인지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