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평화를 위한 예수의 해답
성경을 읽다 보면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뜻이 보이질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마태10장34절)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부모를 존경하고, 형제와 우애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 그건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인류의 상식 아닌가. 그런데 부자지간을, 모녀지간을 그렇게 갈라서게 만들
려고 왔다니. 앞뒤가 맞지 않아 의문이 끝도 없이 올라온다.
하지만 “종교는 논리가 아니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라는 말에 종교는 ‘묻지마,
종교’가 되고 말지만, 나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다.
예수가 말한 평화는 무엇이고, 예수가 말한 칼은 대체 뭘까. 예수가 칼을 내려치는
곳은 나와 아버지 ‘사이’다. 딸과 어머니 ‘사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다.
그 ‘사이’로 예수는 칼을 내려친다. 나와 아버지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딸과 어머니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가족이 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도 그렇다.
꽉 막혀있는 사이에 예수는 칼을 내려쳤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왜 둘 ‘사이’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이란 ‘분리’, ‘독립’을 뜻한다.
모든 통과의례의 첫 관문은 분리로부터 시작된다. 가족이 원수가 되는 경우는 합일
이라는 집착에서 온다. 가족 서로가 분리, 독립, 하지 못한 가족은 서로 원수가 되
어갈 수밖에 없다.
부모는 나의 근원이고 부모로 인해 내가 태어났다. 부자지간은 끈적하다.
모녀지간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를 칼로 자를 수가 없다. 그런 ‘불가침의 영역’을
향해 예수는 칼을 내려쳤다. 왜 그랬을까. 우리의 평화가 ‘진짜 평화’가 아니기 때
문이다. 예수의 눈은 다르다. 예수의 눈으로 보면 ‘가짜 평화’다.
그건 착각의 눈으로 바라본 ‘착각의 평화’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순간의 평화’다.
당나라 때 임제(臨濟)라는 선사가 있었다. 그의 가르침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에
는 그 유명한 ‘殺佛殺祖(살불살조)’의 메시지가 있다. 부처(佛)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제 선사는 진짜 부처를 죽이고, 진짜 조사를 죽이고, 진짜 부모를 죽이라고 한게
아니다. 내 마음이 틀어쥐고 있는 ‘집착’을 죽이라고 했다.
부처에 대한 집착, 조사에 대한 집착, 부모에 대한 집착을 죽이라고 했다.
왜일까. 집착으로 인해 진짜 부처, 진짜 조사, 진짜 부모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칼의 이유’를 명확하게 예수는 말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왜 합당하지 않을까?
진리보다 무언가를 더 사랑할 때, 거기에는 어김없이 집착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이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는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뒷면에는 어김없이 집착의 접착제가 끈끈하게 묻어 있다.
그래서 예수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할 때도, 아들이나 딸을 사랑할 때도 집착을 떼어내야 한다.
큰 사랑에는 집착이 없다. 작은 사랑에는 집착이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
들과 딸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사랑’ 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했다. 그래서 칼을 내려치라고 했다. 집착하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다.
집착하는 평화는 작은 평화다. 더 큰 평화, 영원한 평화를 위해 아버지와 아들 사
이에 묻어 있는 끈적끈적한 접착제를 자르라고 한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른 개의 수레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 통에
모인다. 바퀴 통이 비어 있기에 수레로 쓰인다.
또 진흙을 빚어 그릇을 굽는다. 그릇이 비어 있기에 그릇으로 쓸 수 있다.
문과 창을 만들어 방을 들인다. 방이 비어 있기에 방으로 쓰인다.’
노자는 비어 있기에 더 크다고 말한다.
예수의 평화도 마찬가지다.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사이의 집착을 끓을 때 ‘더 큰 평화’가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는 칼을 건넸다. 그건 싸움을 위한 칼이 아니라 ‘더 큰 평화’를 위한 칼이다.
‘더 큰 사랑’을 위한 칼이다. 우주를 다 채우는 무한한 사랑. 거기로 녹아드는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