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상(無常)하다.
어릴적부터 ‘중마고우’로 지내던 친구가 응급실로, 일반병실로, 중환자실
로 거듭 이동하더니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무상하다. 늙어가면
서 병마와 싸우다 홀로간다. 무상함이란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생멸
(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
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常)’을 바란다. 늙지 않으려는 집착으
로 심지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려는 사람까지 등장한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인생의 고(苦)가 따른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서로 사랑할 때는 아무 조건 없이 ‘마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니 목소리도 부드럽게 속삭인다.
두 가슴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큰소리를 질러대는 관계는 이미 가슴이 멀어진 관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버렸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무상(無常)하지 않은가.? 처음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주 보기가 힘들어 진다.
마주 본다.는 건 정말 똥줄이 빠지게 힘들어 진다.
엄마의 얼굴만을 마주 보던 아이도 어른이 되면서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한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올 때는 마주 보다가 은퇴후 수입
원이 없어지자 아내는 다른 곳을 본다.
아 변했구만 ! 이 또한 무상(無常)하지 않은가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이게 진실이라면 엄마가 아이를 보듯, 아이가 엄마를 보듯 언제든지
마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마주보기가 힘들어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나 연극을 본다.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그러면 딴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탄이 난다.
모순이고 이 또한 고(苦) 아닌가.
그래서 처음부터 “안전거리(安全距里)”를 지켰어야 했다.
연인 사이도, 친구 사이도, 형제 사이도, 부모자식 사이도, ‘안전거리’
가 필요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늘 타이르는 말이 있었다.
“사이좋게 놀다 오너라”
이때 ‘사이’는 적당한 거리를 뜻한다.
시인 칼린 지브란은 <사랑을 지켜가는 거리>라는 시에서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를 춤추게 하라.”고 한다.
‘사이’란 속된 말로 ‘난로’를 대하듯 하라.는 뜻이다.
너무 춥지도 않게, 너무 뜨겁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이다.
세월이 차면 생명도 가기 마련이다.
생명이 다하면 돈인들 명예인들 다 무슨 소용인가.
모든 사람은 다 늙어가고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런데 죽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다.
채우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다.
죽음을 모르니 채우려고만 애쓴다.
시신에 입히는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하지 않던가.
이 무상의 진리를 깨친다면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 질 것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여기서 공(空)이란? 세상의 모든 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 있다가 사라
지는 것들이다. 땡중이 아닌 승려들이 세상을 잊고 깊은 산속에서 수행
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은 다, 이 공(空)사상 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