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스웨덴의 어느 공동묘지 입구 동판에 새겨진 글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죽음은
시차(時差)는 있을지라도 오차(誤差)는 없다. 나는 이 대범한 진리를 왜
잊고 살았을까? 아마 죽음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진정으로 나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잊고 산다. 다 죽어도 나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은 이들의 저 조용한 침묵의 가
르침!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라는 문구를 보면서 숙연해지는 것은 인
지상정 아닌가.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화려한 연회를 열 때마다 노예가 은쟁반에 해골을 받쳐 들고
참석한 손님들 사이를 지나다니게 했다고 한다. 그 건 “메맨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현재의 삶이 더 진
지해진다는 것을 로마인들은 20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 어느 때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거름,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는 일
은 곧 죽는 일이다.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나는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 설
것이다. 보건복지부에서 발행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를 등록할 때 지체
없이 찾아갔었다.
어느 호스피스의 말에 의하면 죽어가는 사람이 “사업에 좀 더 열정을 쏟았더
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마지막으로 전하는 세 마디가 있
다 고 전한다.
‘그때 좀 더 참을 걸,
’그때 좀 더 베풀 걸,
‘그때 좀 더 재미있게 살 걸, 이라고 했단다.
이 시대의 어른이셨던 법정 스님의 산문 <미리 쓰는 유서>라는 책에서 스님
은 ’내가 죽거든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이니 번거롭고 부질없는 짓
은 하지 말라. 그것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화나게 하는 일이다.
스님은 지금껏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결국 타인이다. 우리는 이 세상
올 때도 혼자 왔고, 죽을 때도 혼자 갈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는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타인이다.
스님은 죽음 앞에서 후회되는 일이란 이 세상 살면서 지은 허물도 많았고, 그
중에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허물도 적지 않다고 했다. 젊은 시절 저지른 허물
이 줄곧 그림자처럼 쫓고 있었다고 말했었다.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는 멋대로 살거나 오만방자하지 못할 것이
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후회
를 한다. 만일 내가 죽음에 직면했다면 나는 무슨 후회를 할까? 생각해 보
니 시시 때때로 ‘감사’ 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제일 후회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