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각 장애를 겪고 있다.
중학교 동창생 년 말 모임이 있는 날이다.
모두가 80을 넘겨 청각 장애를 가졌다.
음식점의 홀에서는 소음이 심해 대화가 어렵다.
그래서 방을 예약해 놓고 모인다. 청력(聽力. hearing)이란 귀로 소리
를 듣고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시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겠지만, 그래도 청력과 시력은 더불
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80을 넘기고 90을 살면 누구나 청각 장애를 겪는다.
나는 십여 년 전에 중이염 수술로 한쪽 귀를 잃었다.
의사소통이 다소 불편하지만, 한쪽이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는데
요즘 부쩍 청력이 급속하게 떨어지면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하는 대화는
문제가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나 길거리에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
집에서도 자막이 없는 티비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 대신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다소 늘었다. 교회에 참석해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도 없다.
그 대신 산을 오르며 기도하는 시간은 늘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80 중반을 넘기면 보청기에 의존해야만 커뮤니케이
션이 이뤄진다. 청력이 떨어질수록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커진다. 자기가 말
하는 것을 자기가 들으면서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는 것인데, 자기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노인들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에게 소음이 될까 봐 미팅에
참석하는 것조차 몹시 부담스럽다.
잘 알아듣지 못하면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감, 수치심, 분노 등의 정서적 갈등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을 뿐 아니라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청각 신경세포의 피로가 누적되면 혼자만 있고 싶어지고 휴식을 취
하고 싶어진다. 인지 감각이 사라지면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
를 보면서 매우 불안해진다.
이럴 땐 들숨 날숨,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을 풀어야 한다.
가장 좋은 처방은 혼자서 산행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듣는 게 큰 위안이 된다. 잘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예전에 알았어야 했다.
커뮤니케이션의 93 퍼센트는 보디랭귀지(신체언어, 손짓발짓)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수화통역사들이 열심히 수화로
내용을 전달하는 보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는 사람이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듣고 이해를 하고
있는지, 눈을 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짧게 말을 해야지, 장애 이전의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잘 듣지 못하면 들은 게 아니다.
나는 들은 기억이 없는데 “전에 분명히 말했다며” 왜 그러느냐고 따진다면 어쩌
겠는가. 참으로 두렵고, 원망스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편안하게 듣지 못하면 청력 에너지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진맥진 짜증스럽다. 성의 없이 건성으로 들으면 말하는 사람이 상처를 입을까
봐 걱정이 앞선다. 듣는 사람이 편해야 말하는 사람도 편해서 두 사람이 왈츠를
추는 기분이 될 것 아닌가.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지만, 이제 나도 보청기를 껴야
할 것 같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보청기야 값이 싸겠지만 고급 보청기는 수백만 원
을 호가한다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잘 듣지 못하는 쪽과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쪽 입장은 거의 같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말하려는 쪽에서 보청기를 마련해 줘야 할 것 같다. 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상실하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그러니 인생은 일체개고(一切皆苦), 일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라,
처음 말했던 석가모니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