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식구가 원수다.
추석 명절에 집안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감사와 평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난다.
성경(마태:10장)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평화를 주러 왔다. 고 생각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어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
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원수다.”
라고 말한다.
에이, 설마 예수가 그런 말을 했을까? 믿지 않을 것이다.
왜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벽을 만날 때가 허다하다.
닭이 알을 품듯이 곰곰이 사유하고 궁리해보지만 답답할 때가 많다.
종교는 논리가 아니고 과학이 아니다. 알기 위해 믿으라, 믿으면 알게 된다는
신비주의다.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다.
이때 나를 위로해 주는 성경 구절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부자지간(父子之間), 모녀지간(母女之間)은 끈끈한 관계다.
이 둘 사이는 칼로 자를 수 없다.
이 같은 불가침의 영역을 향해 예수는 칼로 내리친다. 왜일까?
예수의 눈에는 부수어야 할 평화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부부가 평화롭게 잘 사는 것 같아도 위태위태하다,
부자지간도, 모녀지간도, 고부지간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더 큰 평화를 주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성경(마태7장)은 “형제의 눈 속의 티는 보면서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고 꾸짖는다. 네 눈 속에 들보가 들어있다면 상대를 올바로 볼 수 없다.
그런 눈을 가지고 가족의 눈 속의 티를 빼겠다고 덤비면 가족은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 가족이 내 맘에 들어야 한다는 집착을 죽이지 못하면 곧 원수가 된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더 좋은 아빠, 더 훌륭한 아들, 더 똑똑한 딸, 더 자애로운 엄마, 더 순종하는 며느리,
더 자상한 시어머니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곧 집착이다.
그 집착을 칼로 쳐서 죽이고 더 큰 평화를 주려고 예수는 왔다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임재‘ 라는 큰 선사가 있었는데 그는”살불살조(殺佛殺祖)”
하라고 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 는 말로 부처, 조사, 부모나 스승에 대한 집
착을 죽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일어날 줄 모르고 부처만을 믿는다는지 부
모에게만 의지 한다 든지, 스승에게만 기대하는 집착을 죽일 때 우리는 새
로운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이다.
핏줄이 핏줄을 죽이는 존속살해가 빈번해지는 이유는 다 상대에 대한 집
착이 크기 때문이다.
도가의 노자는 “당무유용(當無有用)”이라고 했다.
진흙으로 그릇을 빚을 때 그 속이 비어있어야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그릇의 본질은 껍데기 현상이 아니라 담는 데 있다.
우리는 컵 하나를 고를 때도 모양이나 문양에 관심이 많다.
그 속이 ’비어있음‘은 까마득히 잊는다.
현상만 보고 대응하면 현상에 휘둘려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본질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가족에 대한 편견을 부수고 더 큰 평화를 위해 집착에서 벗어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