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경험(체험)을 보편화 하지마라
“서 있는 위치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는 아주 멋진 말이 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는 풍경이 이 세상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는 말이다. 보이는 것들이 달라지면 기본적인 생각도 달라진다. 아들이 설
거지를 하는 것을 보면 칠칠 맞지 못하고, 사위가 설거지를 하면 최고의
사위가 된다. 이처럼 입장이 다르고, 보이는 것이 다르면 똑같은 행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게 사람이다.
두 사람이 있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게 되고, 60억의 사람
이 있으면 60억 개의 세상이 있다는 말일 게다. 이처럼 한 사람을 바라보며
두 가지 다른 반응이 나오게된다.
하나는 “그래, 맞아. 그럴 수도 있지. 다 실수하며 배우는 거지”라는 반응이
고, 또 다른 하나는 “어찌, 그러냐? 난 최소한 저러지는 않았다.”라는 반응
이다.
답은 아닐지라도 첫 번째 반응은 인격이 그만큼 '성숙'되어 가고 있다는 증
거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허물과 연약함을 품을만한 그릇으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반응은 단순히 내가 서 있는 위치만 달라졌을 뿐
이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한다.
“얘야 별일 없니?” 어쩐 일이세요. “그냥 전화했다.”
이때의 그냥은 그냥이 아니다. *용돈이 필요하다거나, * 보고 싶으니 찾아
오라거나, *내 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냥’을 자주 습관적으로 쓰면 언젠가는 관계가 망가진다.
“그냥”이라는 말에는 스스로 알아주길 바라는 아주 ‘고약한 심보’가 밑바탕
에 깔려있기도 하지만 뭔가 충고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묻지도 않는 조언과 충고는 비난으로 들린다.
이때 조언과 충고는‘당신이나 잘하시지.’라는 말과 같다.
묻지도 않는 조언과 충고를 하고 싶다면 내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을거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어차피 그는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고 결국,
관계만 망가뜨린다. 충고는 기본적으로 ‘너는 틀렸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틀렸더라도 막상 지적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할뿐만 아니라, 청개구리처럼 엇나가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이
나 체험을 보편화 해서는 안 된다. 내 충고가 옳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충고는 안 하는 게 상수다.
내가 싫은 건 남도 싫은 법이다.
묻지도 않는데 말하면 ‘꼰대’ 취급받는 세상이다.
그가 자식일지라도 묻지 않거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가 설령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나중에 후회할지언정 그것은 그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