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querencia)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이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
라 부른다. 즉 피난처이고 안식처라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 뇌는 스트레스에 도전해서 싸우기보다는 도피하고 싶은
게 1차 반응이다.
사노라면 누구나 가끔 숨을 곳이 필요하고 누구나 도망가고 싶은 날이 온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싸우시고 나면 어머니가 어디론가 가버려서 우리 형제들은 밥을 굶고 어머니
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했다. 떨리고 두려웠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어머니를 용하게
도 찾아 데리고 오신다. 어디서 찾으셨을까? 그곳은 어머니의 친정집, 우리의 외가 집이
었다. 그 외가는 어머니의 피난처요 안식처였다. 그곳에 있으면 어머니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 시절의 어머니들의 퀘렌시아는 친정집밖에 없었을 것이다.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심장이 무너질
때는 찾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 다정했던 부부가 다투고 나면 각자 <퀘렌시아>를 찾는다.
남자는 술집을 찾을 수도 있고 여자는 친정집이나 친구 집일 것이다. 그 곳에서 상처를 회
복하기도 하고 나를 지키고 자기 정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로 도망가고 싶
은가?
산일 수도 있고, 강일 수도 있고, 부모님 산소일 수도 있고, 숲속이나 바다일 수도 있다.
도서관일 수도, 주막일 수도, 목욕탕일 수도 있다.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쳐 잠시 숨을 곳이
꼭 필요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다. 자
극을 주는 스트레스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안전기지에 숨어 재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 지칠 때는 비밀스러운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어느 해변의 평화로운 풍경을 찾아
숨을 곳이 많은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정말 기진맥진 지쳤을 때 나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나의 퀘렌시아가 산이듯이 언젠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산(山)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마음을 뒤흔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잠깐이라도 숨 쉴 공간을 갖는 것은 은밀한 즐거움
이다. 절대로 이상한 게 아니라 그것은 본능이다. 인간은 머릿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끊임
없이 오가며 현재의 행복을 온전히 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버티고 싸우는 것만
이 답이 아니다. 마음의 안식처 육체의 휴식공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위
안과 안식을 줄 나만의 퀘렌시아가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보면 어떨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