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죽게 되는가
집에서일까? 병원에서 일까?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에서는 매년 75만 여명, 매달 6만 여명이 죽는다고 하는데 이
중 94.9 퍼센트는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인 대부분은 집에서 죽었다. 집이 아닌
다른 데서 죽는 것을 객사(客死)’라 하여 불행한 죽음으로 여겼다.
병원에서 오랫 동안 투병했더라도 집으로 모셔와 최후를 맞게 했었다.
그런데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상황은 역전됐다.
병원은 사람을 살려내는 곳이자 죽음을 맞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병원에서 마지막을 장식하길 원하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16.3 퍼센트뿐, 대다수는 집에서 삶을
마무리 짓길 간절히 원했다. 내가 죽고자 하는 곳에서 결코, 죽지 못하는
게 한국인이 생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리는 경험이다.
선진국의 전형적인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미국은 9.3
퍼센트만이 병원에서 죽는다. 임종 직전에 집으로 모셔와 온 가족이 지켜
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는다. 그러기에 미국은 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해 가
정에서 쓰는 마약 소비가 많다고 전해진다. 영국은 54 퍼센트가 병원에서
죽고 나머지는 집이나 호스피스 시설 등에서 편안한 최후를 맞는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거의가 임종 직전에 집 밖으로 내몰아 객사를
시키는 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나이 들어가면서 집을 가꾸면 뭘 하나 객사
할 터인데.........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늙으면 기력이 쇠한다.
성경(열왕기상1장1절)에“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고 쇠하여 기력이 없어진지라
신하들이 왕께 고하기를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해 왕의 품
에 누어 몸을 따뜻하게 하겠나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에 아리따운 동녀(처녀)
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심히 아름다운 처녀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다. 저가
왕을 봉양하여 수종하였으나 더불어 동침은 하지아니 하였더라.”고 사족을 달고
있지만, 그 속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의학적인 면에서는 나이어린 처녀의 기를
받아 잠시 기력을 회복할 수 있겠지만 왕 정도 되었으니 가능한 일 아닌가.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 효자들은 노쇠한 아버지를 위해 어린 동녀를 구하였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일반인들 에게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가수 서유석은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최희준은“인생은 하숙생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이 있던가. 있고 없고 잘나고
못나고 따질 것도 없다. 얼기설기 어울려 살면 되는 것 아닌가. 만남도 이별도
기쁨도 슬픔도다 한 순간이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요, 외로움이 아
무리 지독해도 눈보라 일뿐이다. 다 바람 같은 것, 영원히 내것이란 없다. 우린 잠
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시가 있다.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짐이요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누구를 만나면서 살아도 ‘인연’이다.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면
내 곁에서 사라진다. 연인이라도, 형제라 하더라도 그렇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까지도 들어주는 인연을 내가 만들어가야 인생이 팍팍해지지 않
고 평화로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