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칼 위치를 뱃전에 표시한다는 말로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다 강 한복판에서 실수로 아끼던 칼을 물에 빠뜨렸다.
놀란 그는 재빨리 주머니칼을 꺼내 칼을 빠뜨린 곳을 뱃전에 표시를 해뒀다.
그리고 안도했다.
“칼이 떨어진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으니 언제든 찾을 수 있겠지.”
배가 언덕에 닿으려 하자 그는 급한 마음에 표시가 된 뱃전 아래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한데 거기에 어찌 칼이 있겠는가. 칼을 찾느라 허둥대는 그를 지켜보
던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어리석음을 꼬집는 표현이다.
세상일에 어둡고 융통성이 없음을 나무라는 말이다.
강 한복판에 칼을 빠뜨렸으니 배가 언덕에 닿을 무렵에는 얼마나 칼과 멀어졌
겠는가. 그걸 깨닫지 못하고 표시된 바로 아래에서 칼을 찾으려 했으니 그 얼마
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두가 비웃는 이 어리석은 자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우리 또한 어제의 잣대로 오늘을 재려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
다.
누구도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어제의 잣대로 오늘을 잰다.
현명한 자는 오늘의 잣대로 오늘을 잰다.
어제의 잣대는 오늘 잣대의 보조로 쓸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어제에 매이고, 현명한 자는 오늘을 직시한다.
시대를 앞사가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작가이자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같은 일을 같은 방법으로 계속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
람은 정신병자”라고 했다.
흘러간 물로는 발을 씻지 못한다.
오늘을 재는 데는 오늘의 자가 제격이다.
표식은 옛 자리일 뿐 지금의 자리는 아니다.
오늘을 어제에 매 두지 말라는 교훈 아닌가.
발자국은 앞서간 자의 흔적일 뿐 내 발걸음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
기증세다. 사람은 경험 때문에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
에 따라 현명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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