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다.
고속도로의 정체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흙에서 난 것들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무도 못 말린다.
사람도 설령 나고 자란 데가 흙을 밟을 수 있는 시골이 아니라 해도 명절이 되면 고난으로
얼룩진 타향살이를 잠시 접고 떠나온 고향을 찾아 어른들을 찾아뵈고 눈도장이든 몸도장
이든 찍고 와야만 사람 구실 다한 것처럼 편안해진다.
고향은 타향살이에 지친 자식들을 따듯하게 맞아주는 부모님니 계신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어머니가 버선발로 맞아준다.
종교란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고향 찾아 부모님 만나는 것처럼 절에 가서 부처님 만나고 교회가서 예수님 만나는 게 고향
찾는 것 같다면, 절 안 다니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나옹 선사가 돌아가실 때 이런 말을 했다.
불성의 고향은 천지산하 온 우주가 고향이다.
그러니 타향이 고향이고 고향이 타향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번뇌 가득한 공간이 사실은 진리의, 공간이다.
그러니 지금 겪고 있는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해서 특별한 공간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고통을 소멸시키고 행복의 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
‘인생은 고해다’라고 했는데 어찌 고통 없이 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옹처럼 눈 뜬 선사는
고통스런 그 자리가 바로 즐겁고 행복한 자리라고 말한다.
불교의 상징인 아름다운 연꽃이 의지하고 있는 바탕도 결국 세상으로 상징되는 진흙 아니던가.
허공에서는 연꽃을 피울 수가 없는 법이다.
구상이라는 시인이 쓴 시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니라. 가시방석처럼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
로 꽃 자리이니라’고 말했다.
시인의 말인즉, 삶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를 가시방석으로 만들지, 꽃자리로 만들지 내가 살고있는 타향을 고향으로
만들 것인지,는 나에게 달린 문제다.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절대권력자가 될까
봐서래요. 아무도 못하는 일을 당신이 소통잘 되는 꽃 같은 청와대를 만들어 보세요
‘의식이 공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어느 교회 권사님한테 지금 천국에 가겠냐고 물었더니 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