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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매 순간마다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다는 말이다.
‘항상 불변하는 것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常)’을 바란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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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서로 사랑할 때는 아무 조건 없이 ‘마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니 목소리도 부드럽게 속삭인다.
두 가슴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는 관계는 가슴이 멀어진 관계다.
소리친 다음의 침묵은 가슴이 죽어버렸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무상(無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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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주보기가 힘들어진다.
마주 본다는 건 정말 똥줄이 빠지게 힘들어 진다.
엄마의 얼굴만을 마주 보던 아이도 어른이 되면서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한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올 때는 마주보다가 은퇴
후 수입원이 없어지자 아내는 다른 곳을 본다.
아 변했구만 !
이 또한 無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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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이게 진실이라면 엄마가 아이를 보듯, 아이가 엄마를 보듯
언제든지 마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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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주보기를 하지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영화나 연극을 본다.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그러면 딴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탄이 난다.
모순이고 이 또한 고(苦)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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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부터 “안전거리(安全距里)”를 지켰어야 했다.
연인 사이도, 친구사이도, 형제사이도, 부모자식 사이도,
안전거리가 필요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하지 않던가.
지나치면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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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어머니께서 늘 타이르는 말이 있었다.
“사이좋게 놀다 오너라”
사이는 적당한 거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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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칼린 지브란은 <사랑을 지켜가는 거리>라는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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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를 춤추게 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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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란 속된 말로 난로를 대하듯 하라는 뜻이다.
너무 춥지도 않게, 너무 뜨겁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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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은 <순간의 꽃>이라는 시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 갈 때라도 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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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차면 생명도 가기 마련이다.
생명이 다하면 돈인들 명예인들 다 무슨 소용인가.
시신에 입히는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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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인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친다면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 질 것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여기서 空이란?
세상의 모든 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 있다가 사라지는 것.
땡 중이 아닌 승려들이 세상을 잊고 깊은 산속에서 수행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은 다 이 <空사상>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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