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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누구랑 함께 할꼬’ 라는 말이다.
자기계발과 성공철학의 대가 <짐론>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만나는 다섯 사람 평균이 5년 후 나의 모습이다.”
지금 내 주위의 다섯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들의 평균이 <나의 미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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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미래를 바꾸고 싶지 않은가?
그러려면 나 자신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속에 놓아두어야 한다. 부자들과 함께 다니면 부자 되기가 쉽고 범죄자들 속에서 생활하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삶의 수준은 가장 많이 어울리는 사람들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짐론>의 주장대로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나의 미래가 밝아질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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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닮고 싶은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시카코>대학의 허찬스 총장은 졸업할 때까지 “위대한 책 100권 읽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닮고 싶은 위인 한 명을 정하여 그의 모든 면을 닮아가라고 했더니, 이 대학에서 91명의 노벨 수상자가 나왔다. 나라도 아니고 한 대학에서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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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논어> 학이편 제6장에서 이렇게 말 한다.
“행유여력(行有餘力)이면 즉이학문(則以學文)이라” 했다.
무슨 말인가? 맡은 바 임무를 끝내고 힘이 남으면 글을 배우라는 말이다. 여력(餘力)이란 남는 힘을 말한다.
이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여력을 어디에 쓰는지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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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력(餘力)!!
내 경우는 책을 읽거나 산행을 하는데 쓰여진다.
왜 책을 읽느냐고 한다. 늦었지만, 책 속에 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 산에 가는냐? 고 묻는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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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함께할 것인가는 어디서 살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보다 훨씬 중요하다. 어디서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의 문제라는 말이다.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함께 할 사람이 없거든, 차라리 “청풍명월(淸風明月)”과 함께하라고 했다.
스님의 텅 빈 방에는 “여수동좌(與誰同座)”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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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푸는데 여력을 다했고,
예수는 “천지창조의 질서”를 통해 평등과 평화를 위해 여력을 다했다.
예수나 석가모니는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류계층에 편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고민했기에 인류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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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성공학의 대가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이렇게 말한다.
“최고가 되고 싶다면 최고수에게 배우고,
독수리가 되고 싶다면 독수리 떼와 날아라.”
우리는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단정 짓는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려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