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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의 말이다.
인간의 영혼은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카잔차키스에게 그런 삶이 실제로 있었으니 우연히 만나 잊을 수 없는 자취
를 남긴 <조르바> 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기 인생에서 “삶의 길잡이”가 된
한 사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조르바>를 택하겠다고 썼다.
그런데 여기서 확실하게 주목할 점은 조르바는 구조자가 아닌 조력자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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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카잔차키스는 나비가 되려고 애쓰는 유충을 보고 따뜻한 입김을
계속 불어 껍데기를 편하고 쉽게 뚫고 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덕분에 유
충은 껍데기에서 수월하게 빠져 나왔지만 너무 빨리 나온 탓에 날개를 펴지
도 못한 채 죽었다. 예쁜 나비를 얼른 보고 싶은 욕심이 부른 예기치 못한
죽음이었다. 이 일을 통해 카잔차키스는 껍데기를 뚫는 과정과 날개를 펴는
일 모두는 스승의 몫이 아니라 유충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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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의 출산을 돕는 산파가 아이를 직접 낳지 않듯이 스승도 제자에게 없는
걸 억지로 줄 수는 없다. 산모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이 모든 가능성
은 제자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녹록치 않다. 산모가 진통
을 겪는 것처럼 제자도 한 층 더 성장하기 위해 혹독한 시간을 견디며 크고 작
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스승은 제자를 격려하고 실마리를 주는 조력자가
되어야지 카잔차키스가 유충에게 했듯이 구원하려 들면 안 된다. 스승은 제자
의 가능성을 제 맘대로 마름질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비가 되려는 건 유충의
본성이다. 나비가 되기 위한 노력 또한 유충의 책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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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들을 명궁으로 만들기 위해 산속에 있는 유명한 궁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궁사는 아이에게 활 쏘는 법은 가르치지 않고 청소만 시킨다.
그리고는 남는 시간에야 5미터 정도 거리에 쌀 한 톨을 실에 매달아 놓고 쌀이
한 가마처럼 보일 때까지 쳐다보기만 하라고 명한다. 몇 년이 지나도 매일 똑같
은 일만 시킨다. 아이는 여러 차례 도망치고 잡혀 오기를 반복한다.
어느덧 10년이 흘렀고 아이도 20대 초반이 되었다. 어느 날 쌀 한 톨을 쳐다보
는데 쌀 한 가마와 같이 보이는 것이다.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드디어
쌀 한 톨이 한 가마처럼 보인다고 궁사에게 말했다. 그때 궁사는 미소를 지으며
처음 활을 내주었다. 이제 어서 가서 활을 쏘아라. 눈앞에 쌀 한 가마니를 못 맞
출 궁사는 없을 것이다.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 까지다.
스승은 구원자가 아니라 조력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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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뜨거운 태양에 그을리고 매서운 폭풍에 흔들리고 쏟아지는 폭우를 견뎌
내야 비로소 꽃피고 열매를 맺는다. 스승이 꼭 해야 할 역할이 있듯이 결코 해서
는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얻어낸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