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로워도 혼자가 되는 시간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
사람을 만나 바쁘게 사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 볼 때도 있지만,
결국 다시 공허해지고 허탈해져 나를 위해 정말 필요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은 지독한 외로움과 처절한 고독을 경험해봐야 그동안 무엇을
잘못 채웠고 잘못 채운 그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를 사색하게
된다. 사람은 외롭지 않으면 주위의 차림새만 둘러보게 되고 외롭
지 않으면 겉 포장에만 마음이 가게 된다.
나에게는 고독과 외로움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내가 외롭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 고독하지 않았다면 그 짧은 시간
에 1000 여권의 책을 읽을 수도 몇 권의 책을 출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시간 들이 나를 한 뼘 더 성장하는데 밑거
름이 되어주었다.
나는 간서치(看書癡책만보는 바보천치)이지만 종이라는 대지 위에 활자를
벗 삼아 행간을 거닐며 인생을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산을 오르고 내린다.
이게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나만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갖는다는 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
지 고민해보고 그것을 채워보는 시간이 아닐까.
그게 오롯이 내가 되는 시간 같기 때문이다.
세상일이란 내 마음처럼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내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 나는 실패자이고 불행한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그렇게 생각 하기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냥 내 마음처럼
안된 것뿐이다. 또 지금 신경 쓰고 있는 일이 잘 되어야만 앞으로 잘
살게 될 거라는 생각도 대단한 착각이다.
그래야만 행복할 거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부잣집을 흔히 ‘잘사는 집’이라고 하는데 엄격히 말해 잘못된 말이다.
가난한 집을 ‘못사는 집’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하다. 왜 부잣집도 못
사는 경우가 허다하고 가난하지만 잘사는 집도 많지 않던가.
일본의 작가 아키히로가 쓴 <내 영혼의 비티만>이라는 책을 읽다가
“나를 도와줄 사람의 숫자는 내가 남을 도와준 사람의 숫자와 같다."
는 말에 정신이 번쩍이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지금 내가 서있는 곳,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는 말에 또 뜨끔한 충격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