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리코너 장인수 선생 노량진 대성학원 입시 전문학원에서 강사로 퇴직후 1만여권의 책을읽고 주옥같은 내용 을 선별하여 진서리 코너에 게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꿈 자식에게 읽게 하십시요
  • 모스크바의 신사
  • 2020-05-14
진서리





모스크바의 신사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빌 게이츠가 굉장한 독서가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들이 감명 깊게 읽은 책 몇 권씩을 해마다 추천해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책 읽기에 활자 중독이 된 나 같은 사람한테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이 두 사람이 추천한 장편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면서 독후감을 남기고 싶어졌다.

 

이 책은 미국 작가 토올스라는 사람이 쓴 장편 소설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30대 러시아 귀족 로스토프 백작이다. 그는 모스크바 크레믈린궁 근처에 자리한 러시아 최고의 호텔 메트로폴스위트룸에 장기 투숙자로 문자 그대로 화려한 귀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가 몇 년 전에 쓴 시 한 편이 러시아 혁명정부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종신 가택 연금형을 선고받게 된다. 여기서 그가 연금된 가택은 다름 아닌 호텔이었다.

 

물론 화려한 스위트룸 대신 창고로나 쓰면 알맞은 방 한 칸이 제공되었다. 가진 것을 모두 몰수당하고 몰락한 귀족계급의 참담한 생활이 시작된다. 호텔 안에서는 자유롭게 다녀도 되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날에는 당장 총살형이 그를 기다린다. 완벽한 품위로 가득 차 있던 귀족의 삶이 하루아침에 죄수의 삶으로 전락한 것이다. 금수저가 흙수저로 뒤바뀌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밖에 없다.

 

자살하거나, 살아남거나다. 그가 부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의 낭만적이고라고 할 만큼 완벽한 긍정주의를 택했다. 연금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할 일을 찾아 밝게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백작 시절 신사 특유의 매너와 품위를 조금도 잃지 않은 채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환경을 일으켜 세워 호텔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호텔 식당에서 수석 웨이터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오바마나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추천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만약 자신들이 그와 같은 처지가 된다면하고 대비해보는 순간 그 운명의 롤러코스터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너무도 뚜렷하게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흔히 왕관을 쓰고 살든, 머슴으로 살든 운명의 여신이 가져오는 고난은 혼자서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과연 말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운명(運命)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움직일 운()자에 목숨 명()자로 운명이란 역시 변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모스크바 신사>처럼 불운한 손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힘차게 흘러가던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 멈추게 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이 없다. 상처만 남을 뿐이다. 물이 가득 채워져 넘쳐흐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의 그릇은 이처럼 구덩이에 빠진 고난과 시련과 역경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이는 구덩이에 갇혀있는 자신을 할퀴고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데 어떤 이는 물이 구덩이를 채워 넘쳐흐를 때까지 마음을 다잡아 재기를 노려 오히려 구덩에 빠지기 전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

 

세한도를 그린 조선시대 붓글씨의 대가 추사 김정희는 3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참판까지 잘 나가다가 모함에 빠져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다. 그는 구덩에 빠진 걸 한탄하지 않고 그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쓰는 일이다. 먹을 가는 벼루만 해도 10개가 밑창이 나고 붓은 1000자루가 달아서 뭉개졌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은 18년이라는 길고 긴 귀양살이를 전남 강진에서 보내게 된다. 깊고 깊은 구덩이에 빠진 역경과 시련과 절망과 분노와 좌절을 극복하면서 책을 읽고 책을 쓰기 시작한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대작과 수많은 저서를 남겨 후대의 삶의 지표를 세웠다. 그에게 구덩이는 구덩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결국은 남한테서 일어나는 힘든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게 인생이다. 단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확률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것뿐임을 받아들인다면 삶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김정희, 정약용이 <모스크바신사>가 보여준 것처럼 가능한 한 품위를 잃지 않고 긍정적일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려 주는 인생의 지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