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에 맞서는 사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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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우화가 나옵니다.
중국 제나라 임금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가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치켜들면서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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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맹랑한 놈일세. 저게 무슨 벌레인고?”
"사마귀라는 벌레입죠.
앞으로 나갈 줄만 알지 물러 설 줄은 모르는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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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저 벌레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용맹스런 용사가 되었을 것 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벌레가 상하지 않도록 돌려 가도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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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은 미물이 앞뒤를 가라지 않고 제 존재를 드러내는 모습에서 용맹성을 본 것이다.
제가 가진 모두를 버려 뜻을 세우고 구하는 일은 미물일지라도 기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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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무실(無失)이면 무득(無得)”이라고 했다.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면 얻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매사에 물러섬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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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에 맞서는 사마귀의 어리석음이 밉지는 않겠지만,
제 분수도 잊고 달려오는 수레를 막아선다면 그 운명은 어찌되겠는가.
어리석은 사마귀처럼 제 처지나 분수를 잊고 무모하게 대드는 사람을 빗대
“당랑지부(螳螂之斧)”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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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야 할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아니면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지 그 분별을 모르고 일삼아 억지로
나서면 화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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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장수는 섣불리 나서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궁구한다.
그리하여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 자 뒤로 물러난다.”고 노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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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늙은 백작은 인간성의 한계를 자각한 뒤에야
이렇게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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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일 적에 나는 오히려 헛디뎌 넘어지곤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는 조심하는 까닭에 넘어지지 않지만,
눈 뜬 자는 오만함과 경솔함 때문에 작은 돌부리에 넘어지는 법이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 나태해지고, 역경과 시련 속에서 단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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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견디면서
이렇게 말했다.
<!--[if !supportEmptyParas]--><!--[endif]-->“빈곤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툭 틔워주고, 인정물태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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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물 안에서 헤엄쳐야 할 제 운명을 원망하지 말고, 사랑함으로 써 마침내
헤엄치기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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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 연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 가장 높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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