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주기만하는 존재로,
받기만 하는 존재로,
주고받는 존재로 살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심리적 만족을 얻어 의욕과 흥이 생겨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심리적 만족감이 떨어져 기진맥진해지고 기분이 침울해지기도 한다.
불편한 관계에서 느낀 나쁜 감정들이 인생을 고갈시키지만 관계를 끊어내지 못
하고 불만족과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시인 류시화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티베트 우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히말라야의 어느 골짜기에 수달이 사는 호수가 있다.
달 밝은 밤이면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수면으로 헤엄쳐 올라온다.
그러면 호숫가를 배회하던 올빼미가 재빨리 내려와 수달의 손에서 물고기를
낚아챈다."
이 수달과 올빼미의 관계를 티베트어로 '렌착'이라 부르고,
렌착은 '전생의 빚'을 의미한다고 한다.
내 가까운 주변에 수달과 올빼미의 관계처럼 렌착으로 고착화된 삶을 살아가는
형제들이 있다. 자신의 욕구보다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데 에너지를 쏟으며
주종관계로 살아간다. 마치 올빼미가 떠날까봐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수달처럼
관계가 끊어지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며 불공평해 보이는 관계를 당연한 듯이 여
기고 살아간다.
렌착은 부모자식 사이에도 드러난다.
부모가 어떤 자식에게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관계로, 어떤 자식에게는 도움을
기만 하는 관계로 고착화되는 것도 렌착의 일종인 것이다.
관계의 렌착 현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렌착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렌착인지 진정한 애정인지 알아차리는 기준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관계가 순수한 기쁨을 주는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자리하고 있는가?
‘자기희생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결과와 성장을 가져다주는가?'
인간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훌륭한 정원사는 어느 가지가 나무에 유익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알고 가지치기를
할 줄 안다. 정리되지 않은 관계는 인생을 고갈시키고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지치기에 용기가 필요하다.
사실 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관계의 가지치기는 상대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연민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수달의 삶은 수달의 삶이고, 올빼미의 삶은 올빼미의 인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