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를 창시한 선지자 마호메트가 신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군중 앞에 섰다. 사람들은 그에게 먼저 산을 옮기는 기적을 보이라고
소리친다. 마호메트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간다. 모든 사람이 쳐다볼
수 있도록, 그리고는 건너편에 있는 모래 산을 향해 소리쳤다.
“산아! 산아! 네게 이르노니 당장 이리로 오너라.”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모래 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낙타 한 마리가 “히이잉!”하고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마호메트가 다시 소리쳤다.
“산아! 산아! 다시 한 번 네게 이르노니 냉큼 내게로 오라!”
하지만 모래 산은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그가 또 소리쳤다.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그리로 가겠노라!”
마호메트는 언덕을 내려와 모래 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후 수많은 사람들을 굽어보며 외쳤다.
“보라! 산이 내게로 왔도다.”
그렇다. 신에게 구원을 갈구했으나 신께서 오지 않는다면 내가 신에게
로 가야 한다. 고 마호메트는 세상을 대하는 지혜를 알려준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불만 불평이다.
왜 그들만이 나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그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맞추면 될게 아닌가.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려면 내가 꽃에게로 가야 한다.
장미에게 이리 오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다.
행복해지기를 원 하는가. 내가 행복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자기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탓해봐야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합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너 스스로 변해라.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바꾸라는 주문이다.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선 진정한 삶의 개선은 불가능하다.
마호메트가 다시 한 번 소리친다.
“내 안의 모래 산을 옮기라고.”
잠시 내 삶을 돌아보자.
삶의 보금자리에 비가 새고, 벽이 앞을 가로 막을 때가 있다.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가서 제발 고난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걱정과 고난 없이는 영혼은 성장할 수 없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다면 몸만 자라고 마음이 자랄 수 없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는가.
절벽을 뛰어내리는 물이 폭포의 대 장관을 연출할 수 있다.
통쾌(痛快)하다고 할 때 ‘쾌(快기쁨)자 앞에 통(痛아픔)이 있다. 가슴
이 뻥 뚫리는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한다.
화살은 시위를 뒤로 당겨야 앞으로 나간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뒤쪽으로 잡아끈다면 그대를 더 멀리 보내주려는
축복으로 여길 일이다.
연이 하늘을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줄을 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줄만 없으면 자유롭게 하늘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줄의 팽팽한 긴장이 없으면 연은 하늘로 치솟
다가 곧장 땅으로 곤두박질 치 게 된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 든다.
문제는 그 저항을 ‘삶의 방해물’로 여기느냐,
‘자신을 띄우는 부력’으로 삼느냐,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