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어제의 잣대로 오늘을 잰다.
현명한 자는 오늘의 잣대로 오늘을 잰다.
어제의 잣대는 오늘 잣대의 보조로 쓸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어제에 매이고, 현명한 자는 오늘을 직시한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얘기가 있다.
잃어버린 칼 위치를 뱃전에 표시한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다 강 한복판에서
실수로 아끼던 칼을 물에 빠뜨렸다.
놀란 그는 재빨리 주머니칼을 꺼내 칼을 빠뜨린 곳을 뱃전에 표시를 해뒀다.
그리고 안도했다.
“칼이 떨어진 자리에 표시를 해놓았으니 언제든 찾을 수 있겠지.”
배가 언덕에 닿으려 하자 그는 급한 마음에 표시가 된 뱃전 아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데 거기에 어찌 칼이 있겠는가.
칼을 찾느라 허둥대는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은 어리석음을 꼬집는 표현이다.
세상일에 어둡고 융통성이 없음을 나무라는 말이다.
강 한복판에 칼을 빠뜨렸으니 배가 언덕에 닿을 무렵에는 얼마나 칼과
멀어졌겠는가. 그걸 깨닫지 못하고 표시된 바로 아래에서 칼을 찾으려
했으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두가 비웃는 이 어리석은 자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우리 또한 어제의 잣대로 오늘을 재려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흘러간 물로는 발을 씻지 못한다.
오늘을 재는 데는 오늘의 자가 제격이다.
표식은 옛 자리일 뿐 지금의 자리는 아니다.
오늘을 어제에 매 두지 말라는 교훈 아닌가.
발자국은 앞서간 자의 흔적일 뿐 내 발걸음은 아니다.
...........................
정복자 징기스칸의 말이다.
“내 귀가 나를 만들었다” 나는 배운 게 없어 내 이름조차 쓸 줄 몰랐다.
그래서 항상 귀를 열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견문을 넓혀 제국
의황제가 될 수 있었다.
스승은 어디에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스승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이는 자는 스승을 마난다.
고수는 길바닥의 개미에게서도 배운다. 하지 않던가.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
는 말로 좋은 점을 가진 사람을 보고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
을 하고 좋은 점을 갖지 않는 사람을 보고는 저렇게 살지는 않아야 겠
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게 된다는 의미다.
..............................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파생시장은
‘인내심 없는 사람의 돈을 인내심 있는 사람에게 이동시키는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