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거(喫茶去) 중국 당나라 때 선사 조주(趙州)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끽다거’는 “차 한 잔 하시게”라는 뜻이다. 조주 선사는 수행자가 찾아오면 이렇게 묻는다. ‘예 온 적 있는가?’ ‘ 예 온 적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조주선사는 ‘차 한 잔 하고 가시게나.’라고 권한다. 누군가는 ‘온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대답을 들은 조주선사는 ‘차 한 잔 하고 가시게나.’권한다. 조주선사의 행동을 지켜본 원주(절 사람살이 하는 스님)가 물었다. ‘모든 이에게 똑 같이 차 한 잔 권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이렇게 답한다. ‘자네도 차 한 잔 하시게’ ................................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높은 경지에 오른 큰 스님의 짧고 깊은 말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은 조주선사를 찾아온 이들이 얼마나 펄펄 끓는 질문과 무거운 짐을 품고 있기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감수했을 지는 헤아려 볼 수 있다. 조주선사가 왜 모두에게 하나같이 차를 권했는지. 수행자들이 무겁고 무거운 질문을 내려놓고 대신 받았던 한 잔의 차는 어떤 맛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지 않은가. 결국 수행자들이 찾는 도란 물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평범한 일상에서 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 큰 스님 성철스님 살아계실 때 신도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면 먼저 부처님께 3천배를 하고 오시오 하신다. 3천배를 하는 게 어디 쉬운가. 신도들은 3천배를 하는 동안에 짊어지고 온 원통이 다 풀려 스스로 산 을 내려간다고 한다. .......................... 우리는 저마다 간절함을 품은 채 살고 있다. 그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간절함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도 스스로를 지옥으로 끌어내리게 된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고자하는 집착을 버리고, 각자의 소중한 명분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이들을 해탈 (解脫)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 차 한 잔 앞에서 우리는 결심을 밝히기 전에 한 모금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는가 하면 입 속에 맴돌기만 하다가 끝내 못 다한 이야기를 차 한 잔에 흘려보내기도 한다. 한 잔의 차와 차를 마시는 시간이란 서로 의 지옥을 잠시나마 식히는 비범한 순간이 아닌가. .................................. 전주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목에 <심양옥>이라는 멋진 카페가 있다. 나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마주한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 을 내려 다 보고 있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혹시 저들은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말 대신 메신저 앱으로 각자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아닌지. 같은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아날로그 대화와 디지털 채팅으로 서로 다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꼴이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실 만큼의 시간을 서로에게 할애하며 나눠야만 풀리는 인연도 있다.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며, 한 모금의 차와 함께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경험 없이, 차 한 잔이 다 식도록 상대방의 사연을 들어 보는 경험 없이 SNS를 통해 소통하는 사람들이 장차 어떤 세상을 만들지 궁금해지기만 했다. ............................ 절에 스님을 찾는 신도들은 법문을 듣거나 무슨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고 가면 된다. 그러니 가르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어서 오게나 차 한 잔 하시게 ! 세상사 다 내려놓고 ...... 인생이란 본래가 허망한 것 아닌가 ! 있으나 없으나 모두 버리고 갈 것인데 무에 그리 얽매이나 ! 여보 게 차 한 잔 드시게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