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의 위대한 유산>
‘워런 버핏의 위대한 유산’은 그의 막내아들 피터 버핏이 쓴 책이다.
회원님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내가 대신 일고 독후감을 요약해
전하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의 자녀는 2남 1녀다. 장남 하워드, 딸 수전, 막내 피터다.
얼핏 보면 이들이 부잣집 자녀로 귀하게 컸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
았다. 이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인줄 모르고 자랐다.
워런 버핏은 자녀들에게 필요 이상의 돈을 물려주는 것은 재앙이라
고 자주 말했다. 2006년 그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공식 발표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정작 놀라지 않은 사람은 그의 세 자녀뿐이었다.
막내아들 피터 버핏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진정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말 했다. 막내의 말을
듣더니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그렇게 생각했고 그 시기
를 기다려 왔다.”고 말했다.
피터는 29세 때인 1987년 1집 앨범을 낸 작곡가이자 가수다.
아버지의 후광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쉬운 길을 두고 혼자 힘으로
개척해야하는 어려운 길을 택한 것도 이런 가정교육 덕분이었다고
말 한다.
피터의 기억으로는 어린 시절이 아주 평범했다.
특별한 지역에 사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고
부잣집 친구도 없었다. 형과 누나도 어릴 때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자녀들 눈에 비친 버핏은 책을 늘 읽으며 가족들
과 대화를 할 때 가장 행복해하시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에도 에티오피아 출신의 흑인 학생을 며칠씩 집에 대리
고 있거나 오마하대에 다니던 이집트 교환학생을 한 학기동안 머물
게 하기도 했다.
특히 돈에 관한 워런 버핏의 교육은 철저했다.
큰 아들 하워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 차를 갖고 싶어 도움을
청했을 때 버핏은 아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5000달러를 주는 대신 이후 3년 동안 모든 용돈 받기를 포기해라고
했다. 나중에 농장을 하고 싶어 할 때에도 자신이 농장을 사서 아들
에게 임대했고 농장 수익금의 1%를 받는 조건이었다.
막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첫 앨범을 낸 뒤 작업실을 옮기면서 처음으로 돈을 빌려달다고 부탁
하자 버핏은 ‘부자관계가 깔끔해야 하는데 돈이 개입하면 복잡해진다
’고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피터는 은행대출로 이사비용을 마련해야했다.
19991년 인터뷰에서 피터는 “당시는 섭섭했지만 그 덕분에 은행과
관련 된 일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
더라면 지금도 모르는 게 수두룩했을 것” 이라고 말했다.
피터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긴 하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워싱턴포스트 사주의 추천장 덕분에 스텐퍼
드 대학에 입학한 사실을 고백하면서 “손쉽게” 그 자리를 얻은 것 때
문에 갈등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결국 그는 진짜 자신의 길을 찾기로 결심하고 명문대 중퇴라는 비싼
기회비용을 지불했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길이 음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은 큰 부자가 되셨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변해갔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피터는 말한다.
어머니는 여전히 동네 곳곳에 친구들이 있고 다른 사람의 고달픈 사
연에 마음을 쓰는 따뜻하고 인정 많은 분이었다. 아버지도 여전히 소
박한 음식과 검소한 차림으로 책을 가까이하면서 독서에 열중하신다.
이렇게 큰돈이 우리 부모님을 뒤바꿔놓지 않은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그것은 돈벌이가 일의 목적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다. 아버지가 일을 열심히 일한 이유는 바로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
했고 그 일이 아버지의 도전정신에 불을 붙였으며 재미있었기 때문이
다.
억만장자 버핏은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대신 평생을 고향인 오마하의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다. 대게의 사람들은 돈을 벌거나 지위가 높아
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변한다.
‘개구리 올챙이’일적 때를 잊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