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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에서 3박 4일 사찰체험(템플스테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스님께서 꼭 지켜야 할 예절로 묵언(黙言), 차수(叉手), 하심(下心) 3가지 규칙을 당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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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은 말을 일체 하지 않는 수행이다.
세상에서는 말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그치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침묵이 금이다.”하지 않던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장황하게 떠드는 사람이 있다.
내가 많이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겠지만 세계적인 석학들치고 말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말 잘하는 것과 많이 아는 것은 비례하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스스로 부끄러움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떠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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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는 앉아있을 때나 걸을 때도 왼손을 오른 손위에 거볍게 포갠 후 아랫배에 붙이는 수행이다.
이렇게 차수를 하면 내가 모르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무엇인가를 할 때 의식적으로 양손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수는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좋은 방법 아닌가. 생각이 아랫배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복잡하고 짜증이 날 때 10분정도 차수를 해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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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은 굴기하심(屈己下心)의 줄인 말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주는 마음 수행이다.
내 생각이 옳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찾아 높여주고 자신에게는 엄격한 마음을 갖자는 게 하심이다.
비굴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당당하되 내 생각이 받아드려지지 않더라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하심이다.
내가 먼저 하심하면 상대도 역시 하심 하는 마음을 내지 않겠는가.
서로가 하심하면 나뿐 인연도 좋은 인연으로 바뀔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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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무 베듯 시시비비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
저마다 가치관 인생관이 다르고 양심의 수준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딪치고 시비를 따진다면 삶이 괴롭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잘 못이다,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집과 편견이다.
아집은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빠져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고
편견은 넓게 보지 못하고 한 족으로 치우친 견해다.
이런 아집과 편견에 빠지면 생각이 다른 남을 미워하고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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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마태20:28)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고 했다.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마음이 하심이다.
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올라간 것이다. 내려가는 것이 바로 올라가는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면 부딪칠 일이 없어진다.
몸을 낮추면 척질일이 없어진다.
공자는“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했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의미다.
나 좋은 대로하는 것은 배려가 아니다. 상대방이 좋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진정한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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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심장은 항상 뛰고 있는데 느끼지 못한다.
심장이 뛰는 일을 많이 하고 살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감동적인 일을 주고받을 때 심장과 맥박이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느냐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바르게 사는 것’을 잃어버리고
수단과 방법에 얽매일 때가 많았다.
“무엇이 옳으냐, 보다는 무엇이 이로우냐”에 집착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무엇이 나에게 이로우냐가 아니라 무엇이 옳으냐를 따지다가
예수는 빌라도의 채찍을 맞고 피를 흘려야 했다.
진리가 채찍을 맞는 시대가 어찌 예수시대 뿐인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도처에서 진리와 양심의 호소가 채찍을 맞고 있다.
오죽했으면 성철 큰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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