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리코너 장인수 선생 노량진 대성학원 입시 전문학원에서 강사로 퇴직후 1만여권의 책을읽고 주옥같은 내용 을 선별하여 진서리 코너에 게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꿈 자식에게 읽게 하십시요
  • 초상(初喪)집에서
  • 2017-06-21
진서리
         초상(初喪)집 문


  일전에 초상집 문상을 가게 되었다.


성경(전도서7:2)"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라고 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초상집이 될 것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자가 이것, 초상집유심(留心)하라고


한다.


초상집의 특징은 숙연하다. 초상집에는 슬픔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되새기며 반추(反芻)캐 한다.


인생의 허무를 체험하게 한다.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삶의 회개가 있으며, 남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붙잡게 한다.


우리가 잔칫집에 가면 그 날의 즐거움으로 발걸음은 가볍고 즐거움에


이끌려서 더 이상 얻어질 별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즉 그 날의


즐거움은 있을지 몰라도 인생으로서 궁구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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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초상집에 가면, 더욱 더 용서가 확대되고, 마음이 넓어지며,


부족했던 자신이 부끄러우며, 언젠가의 자신의 초상(初喪)당할 인생도 


리 점검하며, 영원에 대한 생명의 가치와 감사와 만족과 기쁨 안에서


은 인생의 신실에 이끌린다.


그러므로 초상(初喪)은 어느 누구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고 경고하고 있다.


  사람은 그 인생이 아무리 영화롭고 화려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고독해


질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일국의 왕자였으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해 보려고 입산수


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무슨 일이든 그 끝은 있기 마련이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은 따라


온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사는, 아니 잊으려 애쓰며 사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행복, 지금의 만족에 안위하며 사는 것이 아닌지, 살펴야 할 것


같다. 때때로 영원히 살 것같이 어떤 일에 집착하는 내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우리는 흐르는 물처럼 여기서 저기로 흘러갈 뿐인데........


어리석게도 그걸 막아보려고 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이든, 항상 시작과 끝을 미리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오늘 날은 많은 사람들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9988234’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


고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120 세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재수 없는 놈은 130도 넘길 거라고 한다.


 더구나 현대의술의 발달로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이 상당기간 연장됨에


따라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시체로 한동안 병원에 억류


되는 죽음의 유예기간이 생겨났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죽지 못


해 붙들려있는 상태 즉 생즉비생(生卽非生),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닌


태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닌 유예상태가 길면 우리 모두가 고통스럽다.


  나는 오래전에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서 자녀들에게 e메일로 보내고


확인시켰다. 다시 말해서 심폐소생술, 인위적으로 숨을 쉬게 하는 기계


호흡, 등의 연명치료를 거부했으며 죽은 뒤 장례는 화장, 매장, 수목장,


해양장, 자연장 중 자연장을 원했다.


  죽은 이후의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죽은 뒤에는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산 자의 몫이 된다.


최근에는 100세를 넘기고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허다해졌다.


이제 죽은 자의 아들이 상을 치루는 게 아니라 손자손녀가 상주가 되는


진 풍경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