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던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으로 위로를 받는다. 실제로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궁지에서도
조금만 참으면 신기하게도 길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더는 못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그 시점에 앞이 보인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지면 그만큼
자신의 그릇이 크다고 생각해야 한다. 참아내기 힘든 고통의 나날이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그 사람의 크기와
본 바탕이 드러나는 법이다.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자기 발전의 토대로 삼을 것이냐는 자기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성경도‘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시며 또한 ‘나를 단련시킨 후에 내가 정금(正金) 같이 나오
리라.’고 말 한다. 신은 ‘시험과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였다.
이 축복은 단지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난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 못한다.
그 고난으로부터 축복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은 영원한 축복을 받는 길이 된다.
이 말은 마치 ‘금속이 불로 제련됨’으로 그 우수함이 드러나듯이 말이다.
철학자 니체는 ‘가혹한 시련이야말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최고의 친구’라고 말했다.
극한의 악조건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겸손함이 묻어 나온다.
히말라야 고산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산(山)에 감사한다.’ 는
말을 잊지 않고, 자신의 노력이나 스스로의 능력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