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리코너 장인수 선생 노량진 대성학원 입시 전문학원에서 강사로 퇴직후 1만여권의 책을읽고 주옥같은 내용 을 선별하여 진서리 코너에 게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꿈 자식에게 읽게 하십시요
  • 궁형(宮刑) 사람의 생식기를 절단하는 형벌
  • 2016-09-11
진서리


                   宮刑(궁형)

궁형이란 사람의 생식기를 뿌리 채 잘라내는 형벌을 말한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는 중국역사 시작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의 방대한 역사서

시대를 이끈 위인들의 인생철학과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한 문학으로서도

손색이 없으며 공자의 춘추와 더불어 최고로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까마득한 과거의

이야기 이지만 권력과 명예 출세 등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에게도 삶의 지혜를 줄 수 있는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삼국지를 열 번 읽기보다 사기

를 한 번 읽으라고 할 정도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애독되고

있는 까닭은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이 깊이 있게 서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

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

는가, 인간이란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현장 답사하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 후 낭중(郎中) 되어 무제를 수행하고 사자로서 출

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마천이 역사서 쓰던 중 장군 이릉이라는 자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부분에서 장군이 무제의 명

을 받고 흉노 정벌하러 떠났지만 패전해서 포로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한 무제는 이릉

에 대해 진노하고 신하들도 이릉을 능지처참하자고 했지만 오직 사마천만 이릉의 충직함을 찬양

하고 두둔하는 글을 사기에 쓴 죄로 한 무제의 미움을 사게 되서 태사령이란 직책을 파면당하

고 감옥에 갇혀서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피하려면 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

거나 둘뿐이었다. 당시엔 궁형을 받느니 죽는 게 났다라고 생각하는 사회풍조였지만 사마천

사기 완성을 위해 궁형을 선택하고 48세의 나이에 생식기를 뿌리 채 절단하는 궁형을 받

고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사기를 완성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그 치욕을 견디며 살아남았고, 그가

하루에도 스무 번씩 식은땀을 흘리는고통 속에 이룩한 역사의식은 후대에 전해져 불후의

역사서로 남고 있다.



인류 문화사에 위대한 명작들은 예외 없이 사마천처럼 인생의 수많은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에 의

해 탄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고, 장님이 되고 나서, 다리가 끊

기고 나서, 한을 풀길이 없어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굽어보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

것이 쉬울 수도 있는 고난에서 그들은 삶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었고 인류역사를

꿀 수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삶을 살아가면서 고난에 처하지 않은 사람은 존

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석가는 삶이란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했다. 생로병사가 모두 고통이라 했다.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과 어려움을 맞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누구는

고난에 당당히 맞서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누군가는 절망에 사로 잡혀 쉽게

너지기도 한다.



하루 가 멀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유명연예인, 사회지도층, 심지

소외계층까지 막다른 길에 몰리면 죽음을 선택하고 만다. 자신의 목숨을 끊을 만큼 절박한 사람

들에게 사마천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마천의 사기의 일부를 예로 든다면 공자에 대해서도 이렇게 기술했다.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씨가 들에서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고 한다.

들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한자로 야합(野合)’이라 한다. 오늘날에도 야합은 비정상적인 관계 맺

을 비판하는 말로 쓰인다. 일흔 살의 노인이 열다섯 살의 처자와 들에서 관계를 맺었으니 정상

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공자는 비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업적을 이룬다는 것이 주 내용

이 된다. 공자의 일생이 그랬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모자의 삶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공자가 15~16세 때 세상

을 떠나 공자는 완전히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런데도 공자는 열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서른 살에 자기 사상을 이룩했다고 자부했다. 요즘 말로 하면 천재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자는 부모 없이 홀로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공자는 누구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일까?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공자는 특정한 스승을 둘 만한 처지

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무엇을 공부했는지는 알 수 있다. 공자는 시(), (), (),

(), (), 역사(歷史) 등 육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육예

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예와 관련한 마땅한 교재는 없었다. 오히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교재를 만들었다.

그는 입으로 전해오는 것들을 정리하여 교재로 사용했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시경(詩經) 서경

(書經) 춘추(春秋)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공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들으며 배울 수밖

에 없었다. 따라서 스승이 필요했다. 그러나 특정한 스승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분발해야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듣고 배워야 했다. 그리고 시대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색했다.

이렇게 자득하여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이룩했다.



이번에는 사마천의 명언 몇 가지를 보자


*()은 이루기 어렵고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