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준비는 다독(多讀)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백 줄의 글을 읽어야
하며, 한 편의 글을 쓰려면 열권이상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 작업이다.
한 페이지 글을 완성시키기 위해 책을 백 권 읽은 사람과 열 권 읽은 사람과 한
권도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누가 글을 잘 쓰겠는가? 글의 성패는 독서량에 비례
할 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인기는 “문장은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러니 재능보다는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한 것 아닌가.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수 많은 대작을 남기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훼밍웨이는 항해일지를 쓰듯 매일매일 작업일지를 썼다. 미래의 스케줄
을 욕심스럽게 적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를 차분히 정리하고 겸허하게 통찰하는 일을 계속하다보니 걸작을 내놓게 되었다.
<불멸의 이순신>을 쓴 작가 김탁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최고의 걸작들을 질투하며 베껴 쓴 시간들이 나를 작가로 만들
었다” 최고가 되고자 최고를 질투하며 흉내 내는 길고 긴 시간에서 내가
탄생했다. 무수한 흉내 내기에서 새로운 탁월함이 나온 것이다. 최고처럼 하다보면
어느새 몸에 배고, 몸속에서 새로운 창조모습이 나오기 마련이다.
법정스님이 한 말이다.
“어떤 사물을 가까이 하다보면 그 사물을 닮아간다”
사람도 그렇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다라 사람의 품격이 달라지는 법 아닌가.
나는 틈틈이 서점을 방문하고,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머리맡
에 책과 노트를 챙겨놓고 잠을 청한다. 잠결에도 무언가 떠오르는 것은 즉시 일어
나 메모를 하지 않고 아침으로 미루면 기억이 없어지고 만다.
이렇게 고된 작업을 왜 하느냐. 요즘 누가 책을 읽느냐. 모두가 스마트폰에서 정보
를 얻고 있는데. 그렇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그러나 나에게서 글쓰기는
‘힘든 삶의 도피처’이자 ‘나를 새롭게’하는 것이기에 오랫동안 견뎌오는 작업
이다.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디지털에서는 불가능한 나날로그에서만 가능한 일
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산을 오르면서도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을
쓰지만, 때로는 쓰는 것보다 지우고, 고치고, 다듬고, 또 다듬고, 깍고, 또 깍는
양이 더 많을 때가 많다. 일필휘지로 한 순간에 글을 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만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글의 원고와 책은 엄연히 다르다. 원고는 있는데 책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
고, 원고자체가 거절당하거나 수정을 요구받거나 심지어 책의 제목만은 자기들이
정하겠다고 한다. 작업 중에도 편집자와 소통이 되지 않아 중단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