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어떻게 알아볼까?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의 <버튼 버튼>이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부인, 당신은 정말로 당신 남편을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을 안다는 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주위의 가족과 친구를 정말로 제대로 알고 있긴 하는가?
순진하다고만 생각했던 친구의 모습에서 냉혹한 전략가의 풍모를 보았는가?
그저 어머니라고만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여자’의 모습을 보았는가?
내가 지금까지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내 앞에 있을지 모른다.
진실이란 때론 이처럼 섬뜩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허상에 휘둘리지 말고 용모와 말과 태도
뒤에 숨은 진면목을 발견해야 한다.
허상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의 과정, 그것이 바로 지성인 것이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방법을 말
하고 있는 구절이다
‘視其所以(시기소이)’ 그가 하는 바를 보고,
‘觀其所由(관기소유)’ 그 행동이 비롯된 이유를 관찰하고,
‘察其所安(찰기소안)’ 그 사람이 무엇을 만족해하는가를 자세히 성찰하면,
‘人焉瘦哉(인언수재)’ 어찌 그 사람이 감춰질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보는(視)것은 관찰(觀)하는 것만 못하고, 관찰하는 것은 성찰(察)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사람의 행동에는 패턴이 있음으로 그 반복되는 패턴을 관찰
하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어떤 때 무
엇을 좋아하는지를 곰곰이 살펴 생각해보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말일
게다.
우리는 좋든 싫든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남들이 정해놓은 기존의 평가에
의존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자신의 눈으로 판단해야 한다.
또한 그 사람이 가진 한 단면만 보지 말고 여러 측면을 관찰해야 한다.
그 사람의 양지만 보지 말고 음지도 보아야 한다.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기뻐할 때와 슬퍼할 때, 얻었을 때와 빼앗겼을
때, 평온할 때와 위급할 때,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를 두루 고려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언행과 그것이 반복된 유형을 오래 관찰해야 한다.
물론 말과 행동 중에서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행동이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을 대표하지 않는다.
말은 너그러우면서도 행동은 이기적이고 각박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이 결코 양보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면 그 사람이
잘 보인다.
‘돈’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돈은 양
보할 수 있지만 명성이나 명예와 관련된 사안은 절대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
이 있다.
이념이나 목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신앙이나 종교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타인이 던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지성인이란 소문을 그대로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허상과 타협
하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남의 말, 남의 신념에 도취된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이 외부의 해석이나 설득이나 선전에 휘둘리지 않고
세계와 타인과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 길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다 해도 우리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아집과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
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길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는 게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귀찮고 힘 든다
고 포기하면 이 담에 왜 내가 그때 경솔했지 하며 크게 후회할 때가 꼭 찾
아 오는 법이다.